유윤영은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자신의 진라면을 후루룩 쩝쩝 축내고 있는 방우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새끼 가위바위보는 더럽게 잘해요…너 막 시간여행해서 내가 뭐 낼지 미리 알고 주먹 냈냐?"
"야 너 따위한테는 능력 아까워서 안 쓴다 ㅉㅉ."
"개쉐끼가…"
둘은 고1 때 같은 반을 배정받아 우연히 유럽 축구 얘기를 하면서 절친으로 격상된 사이였다. 윤영은 티에리 앙리를 흠모하는 아스널빠였고, 방우는 최근에 맨유로 이적한 호날두의 현란한 개인기에 매료된 1인으로서 맨유의 광팬이었다. 좋아하는 축구팀도 상극이었고, 사실 그 둘의 성향이나 배경도 겹치는 점이 별로 없었다.
윤영은 연로하신 부모님께 귀여움을 흠뻑 받고 자라난 외동으로서 80년대 강남 투기로 짭짤한 성공의 맛을 잡숴보신 부모님 덕에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운동을 썩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둥글둥글한 성격 탓에 학급끼리 축구시합을 하면 모두가 회피하는 골키퍼 포지션을 주로 맡았다. 공부도 꽤나 잘하는 편이었지만, 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선 소위 어디서 한가락 하다 왔다는 놈들이 많아서 탑급은 아니고 준수한 편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면 부모님이 원하시는 명문대 법대를 생각하기엔 큰 무리가 없었고, 모의고사도 늘 잘 나오는 편이어서 수능을 두 달 남긴 시점에서도 꽤나 여유롭게 자신의 빈 집에 방우를 초대해서 라면에 소주 한 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제 우리 아빠가 나한테 솔직히 술 좀 마셔보지 않았냐고 물어봤는데 개 뜨끔함."
"실상을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너만 하겠냐. 나야 가끔 너가 줄 때 먹는 정도지 너는 애들 돌아가면서 초대해서 아주 호프집 운영하잖아."
"부모님께서 노년에 인생을 즐기시겠다고 여행다니시면서 집을 비워두시고. 아들 심심하겠다고 돈도 넉넉히 놓고 가시는데. 이걸 활용 안하는 것도 막대한 불효야. 그리고 너도 매번 받아 먹으면서 어디서 내로남불이야 짜식이."
방우는 윤영의 인간다운 면모가 마음에 들었다. 윤영은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았고, 지극히 현실적인 마인드의 보유자였다. 굳이 따지면 의리도 있고 정도 많았다. 대체로 세상에 대해 애늙은이 같은 회의적인 시각을 기반으로 험한 말을 쉽게 하고 가끔 허세도 부렸지만, 근본적으론 괜찮은 놈이었기에 거의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친구였다.
머리도 좋고 성적도 좋아서 나중에 충분히 법조계에 진출할 거라 생각이 되었고, 행여나 자신이 나중에 변호사가 필요하다면 굉장히 굿 픽일거란 확신이 있었다. 물론, 이 놈이 변호사가 아니라 검사나 판사가 되고, 자신이 어떠한 연유로 판검사인 유윤영을 만난다면… 만난다면 정말 싫을 것 같았다.
"야."
윤영의 목소리에 방우는 쓰잘데기없는 생각 회로를 껐다. 윤영은 라면 축내는 방우에게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하는 눈빛을 쏘았다. 그리고는 방우가 거의 비운 냄비를 자신 쪽으로 끌어와 식은 국물을 한 숟갈 삼키며 말했다.
"이새끼 너 방금 라면 먹으면서 웃었다가 인상 쓰다가 또 웃었다가 혼자 뭐하냐. 진짜 소름끼쳐."
"아냐. 딴 생각 좀 했어."
"그게 치매 초기다."
방우는 피식 웃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아버지가 새벽에 만들어주신 전복 미역국과는 차원이 다른, 편의점 진라면과 참이슬의 조합이었지만 이상하게 이게 더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마 옆에 있는 인간 때문일 것이다.
"윤영아."
"왜."
"아까 내가 한 얘기. 진짜로 곧 확인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 미래를 아는 증거."
"뭔데."
"우리 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길 거야. 이틀 안에."
윤영의 젓가락이 멈추었다. 그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아 놔... 야 내가 너 생일이라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진짜 개소리 자꾸 할 거야? 아니 뭐가 뭐 어쨌다는 건데? 같은 수험생한테 지랄하는 것도 한도가 있다 진짜 그러지 마라.... 대체 뭐가 뭐 어쨌다는 건데? 내가 딱 한번 더 니 개소리 들어줄 건데 진짜 장난치는 거면 내가 너 직접 묻어버린다."
"아직 정확한 디테일은 모르겠어. 근데 가게에서 뭔가 일이 생기는 건 확실해. 아빠가 다쳐. 심하게."
"…니가 그걸 안다고?"
"응."
"그러면 막으면 되잖아."
방우는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잔 안에 남은 소주가 형광등 빛을 받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일 아빠 가게에 갈 거야. 거기 있으면서 뭐가 어떻게 되는지 내 눈으로 보고 막아볼 생각이야."
"혼자?"
"아직은. 근데 혹시 모르니까 니가 알고 있어줬으면 해서."
윤영은 한참을 방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여행이니 미래의 기억이니 하는 말은 여전히 믿기 어려웠지만, 지금 방우의 눈에 담긴 것은 허세나 망상이 아니었다. 그건 공포에 가까운 절박함이었다.
"알겠어. 니가 뭘 하든 연락은 해라. 전화 안 받으면 내가 찾아간다."
"고맙다."
"그리고 이제 민준이 다 왔다네. 니가 내 소주랑 라면 털어가는 거 때문에 신경쓰여서 민준이 전화도 못 받았다. 현관문 좀 열어주고 올게."
"어."
방우는 소주를 마저 비우고 빈 병을 식탁 위에 세웠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술주정뱅이 같은 인물이 식탁으로 다가왔다.
"이방우네."
별다른 인삿말도 없이 의자를 끌어와 식탁에 자리잡은 이는 유윤영의 친구 박민준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박민준의 집안은 옛부터 명동에서 사채업으로 큰 돈을 번 음지의 큰 손이었다. 사채왕 집안이 맞기라도 하다는 듯 박민준은 매사에 손익계산이 빠르고 매순간 차가운 인물이었다. 방우는 윤영이 왜 민준과 친하게 지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윤영이네 집도 재정적으로는 아쉬울 게 없는 집이라 딱히 그가 민준에게 기댈 이유도 없었다 - 하지만 자신의 조촐한 생일주를 제공하는 집주인이 초대한 손님에게 불친절하고 싶진 않았다.
"어 박민준. 왔어?"
박민준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새로운 소주 한 병을 까고 자작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박민준은 이방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원체 성격 자체가 유윤영 빼고는 누구에게 편하게 대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남들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건지 무관심한건지 하대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를 홀대하는 캐릭터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이방우와 같은 반이었지만 말을 섞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새끼야 넌 예의도 없냐. 내가 따라줄게 이리 줘봐. 그리고 오늘 여기 이방우님 생일이야. 이거 방우 생일주라고."
보다 못한 윤영이 나서서 민준과 방우 모두에게 새로운 잔을 따라주며 진행자 역할을 맡았다.
"자자, 방우 생일을 위하여!"
세 명의 고등학생은 능숙하게 짠하고 진로 빨간 뚜껑을 원샷했다.
"방우 이제 니가 한 잔 따라봐. 주인공이니까."
"그러지 뭐."
모두는 방우가 따라 준 세 잔을 다시금 짠하고 들이켰다.
"자 이제 뉴페이스 박민준이 한 잔 올려라! 쏴리질러 인사드려 쎄이 박!민!준!"
노력하는 윤영이 가여워보이고 귀여워보이기도 했다. 박민준도 무덤덤하게 장단을 맞추며 한잔씩 따랐다. 세 명의 고딩들은 또다시 원샷하고 옷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이제 무슨 발동이라도 걸린듯 쭉쭉 원샷 때릴 기세였다. 자연스레 방우는 한 잔씩 더 돌리기 위해 소주병을 잡으려했고, 동시에 박민준 또한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소주병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둘의 손은 순간 맞닿았고, 방우는 옆에서 지켜보는 윤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하지만 본인은 선명하게 느끼는 번개같은 무언가를 박민준의 눈동자에서 보았다.
순간적으로 박민준의 눈 속에선 무언가가 변신하는 듯한 형상이 보였다. 찰나의 찰나 동안 보인, 번개같은 변화였지만 분명히 무언가 달랐다. 몇 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실상으론 일초, 이초 정도의 시간만 흐른 상황이었다. 무언가 뒤집힌 눈동자의 박민준이 방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방우~! 너 임마 내가 진짜 생일 축하한다. 내가 좀 숫기가 없어서 그동안 표현을 못했는데 너 진짜 괜찮은 놈이야 알아? 이 형님이 너 생일턱 제대로 쏜다. 오늘은 내가 늦게 와서 염치가 없는데, 이번 주말에 말만해 아무데나 다 간다. 내가 더 소고기도 쏘고, 아는 형들한테 부탁해서 룸도 데려갈 수 있어. 원하는 거 말만해! 진짜 너 멋진 놈이야. 대가리도 똑똑하고, 남자가 봐도 아주 존나게 멋있어요 어? 너 여자는 안 만나냐? 아 입시 때매 미룬건가? 수능만 끝나면 우리 나이트 가자. 내가 다 뚫을 수 있음."
윤영과 방우는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