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안 끝난다.
너무나도 현실감이 쩌는 이 생생한 경험의 타격감이 아주, 아주 오래 지속되고 있다.
방우는 패닉 중이었다. 한 편으로는 어이가 너무 없어서 누구 한 명 줘패보던지, 미친듯이 물건을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질러보던지, 어떻게든 이 가학적이고 기이한 버블에서 탈출하고 싶은 그였다.
동시에 너무나도 유기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상황을 보니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밥을 다 먹고 자신의 방에 돌아가니 자신의 고등학교 교복이 보였고, 책가방과 구시대의 유물이었던 폴더폰, 모든 소품이 그 방에 준비되어 있었다. 소품 하나 하나를 들어 올려 만져보고, 찔러보고, 심지어 핥아보고(?!) 되는 대로 검증을 해봤는데 빼박 현실이었다. 꿈이기엔 너무나도 섬세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이 현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침밥을 다 먹고 나서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쓰러져 취침하셨고, 어머니는 다시 서재로 들어가 탁탁탁 키보드를 두드리며 뭔가 코딩을 해댔다. 그러면서 방문 너머로 빨리 등교하라고 2분마다 잊지 않고 소리지르셨다.
이제 아침 6시 반 정도 된 시간. 다시 경험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고3 인생의 일과 시작을 재차 경험하며 그는 나름대로 현실적인 판단들을 내려 보려 했다.
어젯밤 그는 만취했다.
바텐더가 뭐라 뭐라 이상한 소리를 해댔고,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따위의 멘트를 본인이 시전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거기에 바텐더는 나름 응수해줬고, 뭐 또 보자, 오래된 술을 잘 음미한다 등 알 수 없는 개소리를 했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상황이 발생해도 놀라지 말라는 둥 헛소리를 정말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게 뭔가. 정말 자신의 고3 시절로 타임 슬립을 한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보며 방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좋아해야 할 일인가? 자신이 술을 하도 쳐먹어서 심정지라도 오고 자신은 뒈진 건가? 자신은 아직 취해서 정말 고퀄 꿈에 쩔어 있는 것인가?
모든 선택지 중에서 타임 슬립이 변태적으로 제일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 씨발. 무슨 현판 웹소설임? 먼치킨인가? 그럼 자신은 레전드 초능력 보유자인가? 여기 좀비도 나오나?
우선 정답은 모른다 쳐도 회귀물 웹소설스러운 설정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수용하기로 하고 그는 춘추복을 서둘러 걸쳐 입고 스쿨 버스를 타러 집 밖으로 뛰쳐 나갔다.
중식 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치기 몇 분 전.
이방우는 단짝 친구인 유윤영과 학교 끄트머리에 숨겨진 구석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방우는 망을 보면서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고, 유윤영은 말보로 레드 돛대를 쿨럭거리며 흡연하고 있었다. 학교가 산 위에 위치한 관계로 곳곳에는 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보행로 또는 쉼터가 있었고, 이를 활용해서 흡연하는 학생들이 심심찮게 있는 형국이었다. 다만 학교 자체가 대체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로 즐비했기에 흡연이나 음주를 좀 하거나 일탈을 좀 한다 한들 인생을 포기한 수준으로 막 나가는 캐릭은 별로 없었고 약간의 스트레스 해소 정도로 간주되는 취미들이었다.
"그러니까 니가 뭐, 시간 여행을 한 것 같다는 거지?"
윤영은 어이가 집 나간 것으로도 모자라 토막 살인 당했다는 표정으로 되물어봤다.
"하…됐다 새꺄. 내가 미쳤지…"
"그래도 새꺄. 말해줘서 고맙다. 이 좇같은 수능 공부하느라 하루 하루가 개같은 데 너 덕에 이거 한 대 빨면서 진심으로 웃참하느라 즐거웠다."
"꺼져 씨발놈아…"
"ㅋㅋㅋㅋ 아니 근데 진짜로. 쩌어엉말 만에 하나 니 말이 맞다고 치자. 어차피 나도 또라이 친구 한 명 있으면 인생 재밌고 뭐 어때. 니 말이 맞다면, 개 좋은 거 아님? 너 뭐 미래에서 지옥같은 일 있었대매. 시간 여행하는 영화 보면 보통 그런거 다 해결할 수 있잖아. 왔다갔다하면서 풀면 되는 거 아님?"
너무나도 단순하고 당연하기도 한 말이었는데 방우는 이 말에 잠깐 놀랐다. 본인은 1인칭 시점에서 모든 것을 체험하고 있었기에 상황의 황당함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다음 질문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로 진화한다. 어떻게 이 상황을 써먹을 수 있으며 어떻게 이것으로 잘잘못을 판별하고 시정할 수 있는가.
실제로 아버지의 죽음은 자신의 고3 생일이 지나고서 이틀 뒤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아버지가 일하면서 생긴 사고라 세세한 정황은 몰랐지만 경찰 조사가 진행된 후 어느 정도 아는 것들은 있었기에 어쩌면 이 일을 방지할 수 있을까 싶었다.
또한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발병한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결국 병원에서 맞이했던 슬픈 최후. 더 나아가서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끌고갔던 아경이와의 비극.
이 모든 것에 대해 두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무신론자인 자신은 예수든 알라든 칭송하며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해야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깨달음이 방우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쳐갔다.
회귀물이 맞았다.
아예 하루 일과가 지나고 본인이 하교한 뒤 다시 집에서 생일 저녁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방우는 지금 자신의 상황은 기묘한 이야기라고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장남. 이제 넉 달만 지나면 스무살 되니까 아빠 가게에 한 잔하러 와도 되겠네?"
"아유 됐어 당신은 무슨 소리 하는거야. 멀쩡한 애 당신처럼 술주정뱅이 만들거야?"
"술주정뱅이라니…그래도 내가 언제 술먹고 실수한 적 있나."
"가해자는 당연히 기억 못하지! 내가 요리 못하는 걸 참으로 감사한다 안 그랬으면 365일 북어국 끓이고 살았을 팔자야."
"하이고…내가 아프든 말든 신경도 안 쓰면서.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몸이 성하든 안 성하든 밖에 나가서 돈도 벌고 살림도 하고 요리도 하고. 나 정도면 부처님이지 당신 신랑 잘 만났다고 주변에서 얘기 많이 듣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방우의 어머니 이현숙은 입을 열고 뭐라 대꾸하려다가 이내 그럴 가치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닫았다.
식탁에는 촛불이 이미 꺼져있는 조촐한 케이크와 아침상에서 먹고 남은 반찬이 여럿 깔려 있었다. 이외에도 생일 아침상이 아니라 저녁상이라고 또 아버지가 새로 준비한 큼지막한 계란말이와 오코노미야끼까지 더해지니 흡사 가정집이 아니라 선술집에서 생일을 보내는 모양새였다. 성인이 된 이후 실제로 술집에서 생일을 여러번 보냈었기에 미래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방우는 피식 웃었다.
"이 애비가 마음 같아선 소주 한 잔 따라주고 싶은데 말이야…"
"아 이 양반이 진짜! 수험생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그래서 그냥 마음만 그렇다고 했잖아. 너 1월 1일 되면 아빠가 근사하게 쏘마. 해줄 얘기도 참 많다. 대대로 우리 이씨 가문 남자들은 술에 있어 아주 특이한 내력을 갖고 있지."
아버지가 웃으면서 얘기하자 방우의 머릿속엔 번뜩 불이 켜졌다. 평소라면 저런 말에 아무런 신경도 안 썼겠지만, 어제 오늘의 일들을 감안하면 혹시라도 자신이 모르는 가족의 어떤 비밀이 있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은 상황이었다.
"특이한 내력이요?"
"그래. 우리는 아주 술이 세지."
"그 뿐이에요?"
두꺼운 멋없는 안경테 너머로 이성재의 눈이 아주 잠깐의 찰나 동안 번쩍이고, 이내 다시 평정을 찾았다.
"아니 뭐, 사실 어쩔 때는 안 세. 컨디션에 따라 많이 다른 것 같다. 하하하하! 하지만 우리는 대대로 애주가긴 했어."
또 쓸데없는 라떼 얘기 시작이다라는 표정으로 이현숙은 못마땅한 몸짓을 하며 빈 접시를 들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방우 너가 크면 해줄 얘기들이 정말 많다. 재밌는 얘기들. 니 할아버지께서도 너와 한 잔하고 싶어하셨을 텐데…"
한숨을 쉬며 이성재는 안타까워했다. 방우의 할아버지는 방우가 어렸을 때 지병으로 돌아가셨기에 그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다만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방우와 함께 했던 여러 명절 때는 세뱃돈을 건네는 그의 손에 흡사 큼지막한 자상과도 같은 흉터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할아버지도 애주가셨어요?"
"애주가 정도가 아니었지. 할아버지께서도 술장사하셨어. 그것도 엄청 크게 하실 때도 있었지. 6.25 이후 휴전하면서 미군들이 주둔할 때 평택, 오산, 의정부 등 미군 부대를 전전하시면서 막노동도 하시고, 그러면서 미군들과 친해지면서 양주를 조금씩 넘겨 받아 팔기 시작하셨지. 아마 저어기 종로 쪽에서 서울 최초의 바 중 하나도 할아버지께서 차리셨을 거야. 그 이후에 소주 장사 쪽으로 전향하시긴 했지만. 주류하고는 인연이 깊으셨지. 나도 그거 보면서 자라서 그런지 결국 우리 아버지 길을 따르게 됐네 하핫."
방우는 사이다로 아버지의 자작술에 짠해드렸다. 오랜만의 회상을 즐기는 이성재를 보며 방우는 더 얻을 정보나 힌트가 없을까 궁리 뿐이었다.
"그 시절에 바를 차리셨다고요? 대단하시네요."
"그럼. 그래도 장사가 잘 되서 꽤 오래 운영하셨었지. 나중에는 관리자에게 맡기고 당신은 아주 가끔씩만 들리셨고, 내가 장사 시작할 때 쯤 정리하셨다. 어쩌면 종로 을지로에서 술 먹던 사람 중 나이 좀 있는 사람은 아직 기억하겠지. 부즈라는 곳이었어."
방우는 망치로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분명 어젯밤 바의 이름과 일치하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지만, 이 모든 일련의 사태가 우연이 아니라 필연에 가깝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부즈요? 무슨 뜻이에요?"
"글쎄 아마 네 할아버지께서 미군들한테 배운 단어였을 거야. 영어로 술이라는 뜻이라고 하셨어. 그런데 너 미국 유학 준비하는 놈이 당연히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아?"
"당연히 알죠. 여기서 갑자기 그런 단어가 튀어나올 거라 예상을 못한 것 뿐이죠."
"하하하. 짜식 한 마디도 지지 않네. 여하튼 나는 이제 슬슬 출근해봐야겠다. 이렇게 알바한테 가게 맡기고 늦게 출근하는 날은 항상 뭔가 찝찝해. 새로 온 녀석이 아직 못 미덥단 말이지…"
이성재는 깎지 않은 수염을 엄지로 슥슥 문질러대며 미안한 미소를 짓고 일어났다.
"정말 너 바쁜 거 다 끝나면 아빠랑 한 잔 하자. 뭐 꼭 스무살 되야 마시냐? 솔직히 말해도 돼 너 이미 친구들이랑 좀 먹어 봤지?"
방우는 사실 지금까지 마신 술이 몇 만 병은 될 거라고 말하려는 것을 꾹 참고 온순한 미소로만 화답했다.
"나도 그렇고 할아버지도 그렇고. 술 장사하면서 사람 상대하고, 우리만의 재밌는 경험들 많이 했다. 언젠가 짠 하게 되면 부자지간의 안주거리로는 부족함이 없을 거다."
자켓을 챙겨 현관 쪽으로 이동하는 이성재의 앞에 불현듯 이현숙이 서재에서 나와 황급히 그를 가로질렀다.
"뭐야 당신은 또 어디가?"
"그 산학협력 프로젝트 있잖아. 그거 확정되게 하려고 요즘 여간 정신이 없어. 죽을 맛이야 진짜."
"그거 회의를 이렇게 늦게 하러가?"
"학과장이랑 거기 기업쪽 임원들이랑 회식하고 있어서 나도 들려야돼. 원래는 처음부터 배석하는 건데 늦게 가는 거라고."
"거기 태성소프트? 그 인간들은 주면 주고 말면 말 것이지 뭘 그렇게 사람 오라가라 귀찮게 하는 거야. 하튼 대기업 횡포는 인류 종말까지 영원하리라. 에이씨."
방우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태성?
엄마는 내년이 되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태성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후다닥 나가는 엄마, 그리고 그녀를 따라 나가는 아빠를 보고 고등학생 이방우의 가슴 속엔 두려움과 의심, 분노가 온통 뒤섞여 화마의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