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삑삑삑- 삑삑삑삑-
조폭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뚝배기 깬다는 등의 멘트를 날리면서 야구방망이 휘두르는 건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방망이로 뚝배기를 맞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욱신욱신…이 아니라 욱!!씹!욱!씳!! 의 고통을 헛된 손짓으로 짓누르려 하며 베개에 머리를 비벼대던 방우는 게슴츠레한 눈을 뜨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젯밤 그 바에서 대체 몇 잔을 마신건지…. 대여섯잔? 일곱?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과연 거기서 잘 나와서 숙소를 제대로 잡았으려나 아니면 모찌에게 또 피해를 끼치진 않았으려나 하는 잡념들이 광속으로 머리를 지나가는 순간, 엄청난 괴리감이 엄습했다.
삑삑삑삑- 삑삑삑삑-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클래식한 알람 소리는 대체 뭔가. 근래 사용하던 핸드폰 알람 소리도 아니고,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삑삑삑삑-
고개를 들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니 머리 맡에 탁자와 그 위에 정말 클래식한 알람 시계가 있었다. 호텔 방도 아니었고, 모찌네 집도 아니었다. 이 구리구리한 싱글 사이즈 침대와 이 방은…
"방우야 밥 먹어어어!!"
??
???
이 목소리는… 돌아가신 엄마 목소린데.
꿈인가? 현실감 싱크로가 미친 듯 고퀄 꿈이다. 스토리 전개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퀄이면 좀 더 꿈에 취해있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고 방우는 생각했다.
"방우야 어서어! 먹고 학교 가야지이~!"
개쩐다… 엄마 혼이 울고 갈 수준의 성대모사…일본 술은 꿈꾸는데 최적화되어 있는 건가… 반쯤 정신나간 상태로 이 꿈같은 꿈아닌 꿈같은 상황을 어떻게 평가해야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아예 방 문이 활짝 젖혀열렸다.
"야 이방우! 생일은 축하하는데 빨리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 가. 또 버스 놓칠라. 아빠도 일어나 계셔! 얼렁 옷입고 나와!"
????
돌아가신 아버지도? 이 쯤이면 이따가 다시 그 부즈 바에 가서 거나하게 또 취해봐야겠다. 내일 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나오시려나.
일단 속는 셈치고 일어나 침대에 걸터 앉았다. 좁디 좁은 방을 둘러보니 잊고 살았던 옛날의 고등학교 시절 방이 조금씩 눈에 익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브로마이드 포스터가 큼지막하게 붙어있는 벽을 타고 내려오면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ㄱ자형 책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왼쪽에는 3단 책꽂이에 수많은 미국대학 준비용 문제집과 교과서가 빼곡히 정렬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수능 및 국내 교과 관련 문제집들이 좀 있었으며 그 외에도 영화제작 및 촬영기법, 대본집필 등에 관련된 서적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아침인데도 켜져 있는 백열등은 ㄱ자형 책상의 나머지 절반인 책상 오른 편을 비추고 있었고, 거기에 배치되어 있는 PC 화면은 켜진 채로 참혹하게 참교육 당하고 있는 '풋볼 매니저' 게임의 한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음… 풋볼 매니저 게임을 엄청 많이하고, 좋아하는 것 대비 엄청 못했던 과거 기억이 되살아났다. 거의 몇년 째 잊고 살았던 기억인데 이를 당황스러울 정도로 훌륭하게 재현한 꿈 속 싱크로율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방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엄마를 빙자하는 NPC(?)의 뒤를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로 나가니 정말 고등학교 때 거실과 부엌, 식탁 등이 그대로 보였다. 게다가 경직된 표정의 노무현 대통령 사진이 1면에 큼지막하게 배치된 조간 신문을 펼쳐 들고, 멋없는 두꺼운 테 안경으로 사회 면을 정독하시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과거에서 스샷 뜬 수준으로 정확했다. 식탁에는 여러 반찬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끈한 미역국이 정성스레 준비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신문을 내리시고 신문 너머 안경 너머로 작은 눈을 명량하게 치켜뜨며 인삿말을 건넸다.
"장남 왔어?"
영락없는 아버지였다. 방우네 집에는 외동인 방우 하나 뿐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늘 방우를 장남이라고 불렀다. 방우는 과거 설날에 친척들을 대전에서 만나고 다시 상경하는 귀성길에서 언젠가 그 이유를 물어봤었는데, 아버지는 어쩌면 나중에 동생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황당한 답변을 늘어놓고 대수롭지 않은 채 다시 기차 좌석에 뒤로 기대며 신문을 읽기 시작했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엉뚱한 면도 있으면서 가족에 대한 남 못잖은 애정을 늘 간직하던 사람이었다.
"이게 다 뭐에요?"
어안이 벙벙한 방우는 이 꿈에서 엑싯하든 나아가든 뭔가 액션을 취해야할 것 같아서 되는 대로 대사를 내뱉었다.
"뭐긴, 너희 아빠가 너 생일이라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미역국 끓이고 반찬 다 만들었다."
맞다. 방우의 엄마는 요리를 안 했다. 평생 국자나 과도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컴퓨터 공학과 교수였던 그녀는 일생의 대부분을 한국 컴공계의 홍일점으로 보내며 방우가 너무 어려서 잘 이해도 기억도 못하는 부류의 연구에 불철주야 매진하다가 방우가 대학교 유학 중이던 시기에 불우한 말로를 보낸 여자였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또 어땠나. 사실 방우는 그의 아버지인 이성재에 대해 엄청나게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그가 알기로 이성재는 한 평생 술 장사를 했었다. 정확하게 몇 개의 점포를 차렸다가 망했고, 어떤 주종을 어떻게 팔았으며 어떤 호프집을 운영해봤는지, 바는 열어 봤었는지, 주류를 유통해본 적은 있는지 등은 전혀 몰랐고 딱히 관심도 없던 방우였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버지는 한평생 술 장사를 했었고, 마지막으로는 용산 보광동 집 근처의 한남 오거리 쪽에 이자카야를 오픈해서 운영했었다. 안주 요리는 모두 손수 개발할 정도로 요리 실력이 수준급이었고 인심이 후해서 서비스도 잘 주고 심야식당 마냥 메뉴에 없는 것들도 적당한 선에서는 해줬기에 입소문이 타서 금새 동네 명물로 입지를 굳혔던 업장이였다. 특히 그때 캠퍼스가 바로 옆이던 단국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는 가성비 쩌는 핫플로 유명했었다-고 아버지가 자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싱크로율 높은 꿈 속 스토리 - 인지 뭔지 이제는 솔직히 헷갈리기 시작한 방우였다 - 에서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아버지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요리를 했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자카야 운영 때문에 보통 새벽에 귀가해서 해가 중천에 걸리고 나서도 한참 뒤에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께서 요리하셨다고요?"
"하 참나. 우리 장남은 감사합니다부터 안 나오고. 참 뭣하러 자식 새끼들 키우는 건지… 그램마 내가 했다. 왜. 내 아들 생일 밥상 차려주면 어디 덧나냐?"
단어 초이스는 저래도 한 단어 한 음절에 묻어나는 자식 사랑. 방우는 너무나도 그리웠던 아버지의 목소리에 뭉클해지는 감정을 억눌러 보았다.
"아..감사합니다."
"그래 방우야. 아빠가 너 생일이라고 어제 퇴근하고 잠도 안 주무시고 요리 다 준비해놓으셨어. 아마 너 이거 먹고 집 나가면 뻗어서 내일 일어날걸? 엄마가 뭘 거들어주지도 못해서 미안하네 호호호호."
"뭐 그런건 됐고, 미역국에 특별히 전복 좀 넣어봤다. 우리 수험생 장남 보신 좀 하라고. 저번에 같이 제주도 갔을 때 전복 미역국 좋다고 했지? 아빠가 그런거 다-아 기억하고 특별히 만들었단 말이다. 너 반응 보고 가게 메뉴에 좀 각색해서 넣어볼 수도 있어. 하하하!"
어쩐지 아버지 웃음에 피로가 쩔어 있었다.
일단 방우는 머쓱하게 웃으며 현재 이 가상 현실 같은 상황이 뭐가 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넥스트 스텝으로 스토리를 진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혹시 아나. 여기서 숟가락을 들고 미역국 한 숟갈을 큼지막하게 건져 입 속에 넣으면 무슨 상태창이라도 눈 앞에 뜰지.
그리하여 미역국 한 입을 들고 입으로 토스해서 음미하는 순간.
그 전복의 촉감과 미역국의 염도, 온도가 그의 기억을 살려냈다.
이건 찐이었다.
정말로 그가 고3이었던 해, 그해 자신의 생일에는 아버지가 전복 미역국을 아침 일찍 준비해주셨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 자신 모두가 자신이 일찍 등교하기 전에 아침밥을 함께 먹었었다. 생각해보니 그때 정확히 이런 대화를 가졌었다.
그리고 이 촉각, 미각, 후각, 시각, 청각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건 존나게 현실이라고. 꿈도 아니고,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생물체들은 NPC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