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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7잔 먹고 7년 되돌리다 · Episode 5 · KorBBH

카루이자와 7잔

최면술을 연상시키는 짧은 폭포가 끝나고 방우는 두번째 카루이자와 잔을 한 손에 든 채 몇 초간은 시선으로 그것을 음미했다.

그리고 순간적인 동작으로 잔을 벌컥 입에 털어 넣고 삼켰다.

그의 목넘김 소리 - 그의 속이 타들어가는 소리 - 가 쥐죽은 듯 조용한 바의 빈 오디오를 투박하게 메꿨다.

"바텐더님 성함이 '쌔미'신가요?"

"네 맞아요. '샘이'에요."

"여기서는 일하시는 분들은 영어 이름을 쓰시나보죠?"

샘이는 흘러 내린 왼쪽 머리를 다시금 왼쪽 귀 위로 넘기며 무채색하게 대답했다.

"아뇨 제 본명이에요. 한글로 이름이 '샘이'에요."

"아…'샘.이.'요…줄여서 그냥 '샘'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옹달샘…맑은 샘..처럼…이름이 참 좋습니다. 뭔가 하시는 일과도 좀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하하."

토막난 정신머리가 볼품없는 안주여서였을까. 방우는 이미 두번째 잔이 위를 타고 내려가면서 취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아침부터 별다른 안주 없이 빈 속에 온갖 술을 퍼부어 마신 점을 참작하자면 아직 정신머리가 남아있다는 게 어이가 없는 상황이긴 했다.

샘이는 볼품없는 방우의 개그에 특별히 반응해주지 않고 아주 가벼운 미소 정도만 지어줬다.

"샘이님. 제가 부자도 아니고. 엄청 좋은 술을 많이 마셔보진 않았어요."

"그런가요?"

"네. 이런…엄청 오래된 귀한 일본 위스키는 처음이네요. 이렇게 몇 십년된 술은 정말 엄청 더 맛있고 더 가치있는 걸까요? 시간에 비례해 화학적으로 성분 자체가 뭔가 업그레이드되는 게 있나요?"

말을 하고나서도 이제 20대 중반인 자신보다도 어려보이는 그녀에게 깊이있는 대답을 기대할 수 있으려나 반신반의하는 방우였다.

"술이야 기간도 기간이지만 보관 방법이나 상태, 주종, 제조자 등에 따라 너무 천차만별로 다른 것 같습니다만."

뻔한 소리를 하는 그녀를 두고 방우는 혼자 코웃음을 쳤다. 무례해보일 수 있는 이런 반응을 한다는 것은 이제 취기가 꽤 많이 올라왔다는 뜻이었다. 빨리 어딘가 숙소를 잡고 이 하루 역시 마감해버려야 했다. 문제는 완전히 맛탱이가 갈 때까지 마시고 필름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것.

"한 잔 더 주세요."

"괜찮으실까요?"

취기 때문일까. 괜찮냐고 묻는 그녀의 표정은 전혀 걱정어린 표정이 아닌 걸로 보였다. 오히려 살짝 기대감에 찬 표정에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럴리가 없는데.

자칫하면 진상 손님 하나 생길 수도 있는데 기대감이 있을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네 괜찮아요. 빨리 먹고 빨리 갈게요."

"네 한 잔 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숙련된 손동작으로 카루이자와를 또 한잔 따르는 그녀. 방우가 냉큼 세번째 잔을 낚아채자 한마디 첨언한다.

"고객님께서 아까 물어보신 오래된 술의 가치…아마 고객님보다 이 세상에서 오래된 술을 더 잘 음미하시는 분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웬 얄팍한 상술보다 못한 허술한 멘트일까. 이미 본인이 너무 취해서 그냥 놀리는 건가.

"그건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였어요. 술…그리고 오래된 술. 그리고 그러한 술로 취하는 것. 이것과 관련해서 적어도 이곳에선 고객님보다 더 특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쓰러지기 전에 비싼 술 더 쳐먹으라는 낚시성 멘트 이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방우는 한숨을 내쉬며 세번째 잔을 원샷하고 장단을 맞춰주겠다는 의미로 슬쩍 웃고 검지를 들어올려 한 잔 더 달라는 동작을 취했다.

"샘이님."

"네."

"일단 한 잔 더 주시고요…시간은 약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오랜 상처도 아물고.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더 성숙해지거나 지혜로워져야 정상이고. 오래된 술도 시간이 흘렀으니 숙성이 되는거라고 하고. 시간이 최고네요.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더라면. 시간에 구걸하지 않고…시간을 굴복시킬 수 있더라면…"

넷째 잔이 순식간에 오고 갔다.

"고객님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으세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세상 누가 그런 기회를 마다하겠어요?"

"왜..소원은 신중히 빌어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니미… 부자 걱정 연예인 걱정할 필요 없잖아요. 일단 돈 벌고 유명해지고 난 다음에 그런 고민해도 되지 않나요? 소원도 일단 갖고 나서 고민하는 거죠 뭐. 적어도 지금 제 인생보다는 날 거 같애요. 두번째 기회같은 걸 얻을 수나 있다면."

샘이는 찐으로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오묘하게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방우를 응시했다.

"그 말, 나중에 꼭 기억하세요. 다음에 만나면 또 얘기해봐요."

"그래요. 오늘을 기억이나 한다면 무슨 얘기든 또 못하겠어요. 우선 한 잔 더 주세요."

그리하여 다섯번째 잔이 오가고, 여섯번째, 일곱번째 잔이 오갔다. 눈 뜨고 있기가 어려워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어렴풋이 샘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일 주무시고 일어나셨을 때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라 하시더라도, 놀라지 말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든 저희 업장을 찾아오신다면 또다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개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대놓고 멕이면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튼 영업 컨셉 한 번 희한하다고 생각하면서 방우의 밤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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