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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7잔 먹고 7년 되돌리다 · Episode 4 · KorBBH

롯본기 BOOZE

모리 타워를 지나, 롯본기 역이 보였고, 아무 생각없이 좌회전 우회전하며 롯본기의 뒷골목들을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목적없이 걷다가 방우의 눈에 들어온, 어슴푸레하면서도 묘하게 선명한 후광을 내는 간판 하나가 있었다.

<BOOZE>

'술'이라. 하하.

술을 뜻하는 영미권 은어를 활용한 간단한 작명 초이스가 맘에 들었던 방우는 피식 웃고 간판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은은한 외부 간판의 후광에 걸맞게 '부즈'라는 바의 내부 또한 어두웠다. 짙은 색 계열의 목재와 진청과 같은 낮은 채도의 가죽으로 구성된 미드 센추리 모던 인테리어는 곳곳에 비치된 도서관형 녹색 레트로 램프들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은 초저녁이라서 손님이 없는 건지, 아니면 늘 손님이 별로 없는 업장인지 분간이 안 됐지만 텅 빈 바 내부에서 홀로 근무 중인 바텐더는 방우가 출입하자 공손한 목례로 그를 맞이했다.

프로페셔널한 검정 베스트 밑의 흰 와이셔츠는 목 지점에서 검정 보타이로 잠겨있었으며, 베스트 위의 명찰을 힐끗 보니 'Sammy'라는 이름이 영문으로 적혀있었다.

바 쪽에 자리잡은 방우는 간단한 일본어로 메뉴를 주문했고, 광활한 위스키 메뉴 속에서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혹시, 찾으시는 스타일이 따로 있으신지요?"

샘이는 조심스레 방우에게 질문했다.

방우는 고개를 느릿느릿 저으며 말없이 메뉴판을 더 들여다보다가 한참 이후에 입을 열었다.

"한동안 일본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바에서 마시기에 적당한 게 뭐가 있을지 궁금하네요."

"아…"

방우의 그늘진 표정을 읽은 샘이는 검정색 단발머리를 왼쪽으로 넘기며 자신의 왼편에 마주한 선반의 끝을 바라보았다. 방우가 더 말이 없자 그녀는 허락을 특별히 구하지 않고 왼쪽 선반 끝 안쪽에 놓여 있던 병을 하나 꺼내어 방우 앞에 내려놓았다.

"카루이자와라…1970년산…"

혼자 라벨을 소리내서 읽던 방우는 메뉴에서 해당 제품을 찾아보았다.

"헐…대박이네."

메뉴 뒤쪽에 숨겨져 있던 이 술의 가격을 보자 방우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한국어로 속삭였다. 그가 들어보지 못했던 이 로컬 위스키가 자신이 지금껏 봐온 잔술 중 가장 비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돈을 아낄 이유가 없는 방우는 그녀에게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고, 샘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가볍게 웃으며 테이스팅 글라스를 오른 손으로 고정시켰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이 일본 보틀을 들고 느긋하게 카루이자와를 따르는 그녀의 가녀린 왼손에 시선을 두다보니 방우는 샘이의 중지 안쪽에서 싸리나 비단풀을 연상시키는 약초 모양의 검정 타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상체가 왼쪽으로 틀어진 채 술을 따르는 그 모습을 조금 더 주시하니 아직 왼쪽 귀 위로 넘겨져 있는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포근하다 못해 따스하기까지 한 광이 났고, 귓바퀴 안쪽으로 넉넉하게 형성되어 있는 그녀의 외이도는 마치 그의 마음 속 슬픔에까지 귀를 기울이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형용할 순 없었지만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바텐더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무렵, 방우의 머릿 속에선 혹시 본인이 이미 너무 취한 게 아닌가 하는 자성적 발상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카루이자와 1970년산 한 잔을 다 따르자 방우 쪽으로 글라스를 건넨 샘이는 방우가 처음 출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목례를 했다. 천천히 잔을 음미한 방우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술을 호평했고, 한 잔을 추가로 주문하자 샘이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한국어로 주문을 되물었다.

"한 잔 더 맞으신가요?"

오른쪽 눈썹을 순간적으로 꿈틀거리며 방우는 재차 구매 의사를 한국어로 표현했다.

"그렇습니다. 안 되나요?"

"아뇨, 됩니다. 특별한 술을 권해드린 건데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네 향도, 여운도 일품입니다.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네.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네…한국 사람이에요."

"아 그러세요? 처음엔 상상을 못했는데, 한국어 발음이나 억양이 너무 완벽해서 혹시나 했어요. 유학생이신가요?"

방우는 샘이의 다소 앳돼 보이는 얼굴을 살피면서 그녀가 과거 자신처럼 해외에서 유학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처지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무언의 미소로 고개를 흘리는 그녀를 보자 자신이 낮술을 너무 많이 해서 쓸데없는 개인적 질문을 한 것은 아닌지 자책했다.

"유학생…은 아니지만 견습생 비슷하게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묘한 말을 내뱉으며 시선을 피하는 그녀.

그러면서 잠시 말을 이어나갈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샘이는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나 고객님께서 잊고 싶으신 어떤 일이 있으시다면…이 술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곳은 마주하기 괴로운 현실에 대해…무언가 해볼 수 있는 곳이에요. 다만, 충분히 많이 드셔야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으실 것입니다."

방우는 큭하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사래를 쳤다.

"영업을 독특하게 하시네요. 네 당연히 많이 마시면 오늘은 확실히 잊을 수 있고, 또 내일은 확실히 숙취도 있겠네요. 어차피 오늘 쓰러질 때까지 마시려고 했어요. 괴로운 현실이요? 그거에 대해…저도 참 무언가를 해보고 싶네요. 계속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으니까 계속 술먹고 폐인처럼 지냈나봐요. 아직 효과가 어느 정돈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을 끝내자마자 방우는 너무 TMI를 속사포처럼 읊어댔나 싶어 후회했다.

쓴 웃음을 지은 샘이는 특별한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카루이자와 추가 샷을 방우의 글라스에 따랐다. 테이스팅 글라스가 오늘 저녁 두번째로 채워지는 짧고 작은 폭포 같은 소리에는 모종의 최면성이 깃들여져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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