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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7잔 먹고 7년 되돌리다 · Episode 3 · KorBBH

아자부주반 편의점 위스키

"어이. 어이. 얌마 일어나."

어깨가 교대로 흔들리고, 뺨 한쪽에 가벼운 타격감이 인지되면서 방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의 눈 앞 흐릿한 형체가 선명해지면서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모찌..?"

"그래 임마. 너 어제 너무 많이 마셨어.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

"음…"

둔탁하고 예리한 통증이 동시에 두개골 전역을 괴롭힌다. 하지만 이내 방우를 더욱 괴롭게 한 것은 알코올로 인한 뇌혈관의 팽창보다 알코올로도 저지되지 않는 그의 근황에 대한 기억이었다. 정신이 들며 기억이 돌아오자 그의 현실의 기억이 매섭게 진격해왔다. 그가 도쿄로 와서 대학 친구 모찌의 아자부주반 아파트 거실에 널브러져 있게끔 한 뼈저린 현실.

출근하면서 모찌가 놓고 간 진통제를 삼키고 물을 거의 1리터를 마시니 얼굴에 혈색이 좀 돌아오는 듯했다. 물병 포장지의 히라가나와, 냉장고 안의 모든 히라가나가 지금의 원망스러운 현실을 상기시켰다.

한남동에서 아경이의 가족을 처음 만난 건 반년 전의 일이었지만, 벌써 반십년은 더 흐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록 긍정적이라고 할 순 없는 첫 인사였지만, 현실이란 것이 이제 갓 20대 중반을 넘어가는 두 남녀에겐 녹록치 않았고 결국 두 남녀는 그녀의 가족에 의지해보기로 결심했다.

방우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아경은 새 생명 - 그리고 두 남녀가 그리고자 하는 공동의 미래 - 에 대한 첫 언급은 본인이 단독으로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따라서 그녀가 그녀의 가족에게 정확히 언제, 어떻게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결과 만큼은 방우도 신속,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 어떠한 축하도 없었고, 아경은 당장 이 관계와 관련된 모든 상황을 정리하거나 짐싸서 집을 나가라는 선택지를 받았다.

후자를 선택한 그녀는 방우의 열 평짜리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북향이었지만 함께 있으니 그리 춥진 않았고, 만개한 벚꽃은 뱃속의 새싹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가끔 잠을 뒤척여 일찍 기상한 날이면 방우는 창 밖으로 일출을 응시하고 그 아래 잠들어 있는 아경을 훔쳐보며 속이 꽉 차는 행복감에 젖곤 했다.

하지만 행복감이란 야속하게도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도망치는 존재였다. 새벽의 일출을 지나, 세상이 눈을 뜨고 일과가 시작되면 현실이 어김없이 방문하여 젊은 두 남녀에게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심고는 했다. 반복되는 불안의 재배는 아경의 칩거와 심히 불균형적인 영양 섭취로 이어졌다. 아경의 불면증은 심해졌고, 두 남녀의 고립감이 극에 달한다고 느껴질 때 즈음, 정기 진단을 위해 산부인과에 내원한 것이 모든 것이 바뀐 시점이었다.

"어젯밤부터 쭈가 안 움직인 거 같애."

"그게 무슨 말이야?"

"너무 고요해. 내가 침대에서 오른쪽으로 뒤척거리면 내 오른쪽을 툭툭 치는데 그게 없어. 왼쪽도 그래."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모르는 방우는 아경에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운전대 너머 보이는, 산부인과 방향의 도로 위의 차선과 차량에만 신경을 썼다.

청진기 역시 고요했다.

"...멎었나요?"

"그런 것 같네요."

그 이후에 정확히 어떤 말들이 오고 갔는지 방우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생각보다 초연하게 있었던 순간들도 존재했고, 어떤 순간부터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오열했다. 익일 진행할 유도분만에 대한 대화를 나눈 뒤 오피스텔로 복귀했고, 다음 날 병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차가웠던 그 아이를 안았다.

아이를 보낸 후 고장난 일상이 견디기 어려워지자 방우와 아경은 일본으로 향했다. 그동안 참았던 사케도 원없이 마시면서, 아경의 가족이 도쿄에 두고 있는 빈 집을 활용한다는 계획이었다. 두 사람을 이어줬던 모찌도 자주 불러내어 시부야와 롯본기의 주점들을 투어하며 그들은 기분 전환에 성공하는 듯 하였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한 아경의 가족은 조치를 취하여 빈 집 사용을 금하였고, 형편에 맞는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발버둥치며 다시금 현실과 마주한 두 남녀는 무기력감에 빠졌다. 잔고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방우는 다시금 한국으로 넘어가 일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만큼 아경을 우울하게 하는 것은 없었다.

현금화가 가능한 자산을 찾아보려던 아경은 곧 자신의 모든 자금줄이 끊겼음을 확인하였고, 단순히 물질적인 단절을 넘어 주변과의 정서적 유대가 단절되었다고 비관하던 중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경시청에서 다녀가고 시신이 옮겨진 후, 유족은 도쿄로 넘어와 방우와 아경이 잠시 사용했던 집에서 조용히 가족장을 지냈다. 한국 언론은 적절히 통제된 듯 눈에 띄는 관련 보도는 없었으며 이제 세상에서 아경을 추모하는 이는 방우 혼자라고 느껴졌다.

방우에게도 잠시나마 익숙했던 고 회장의 도쿄 자택은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방우에게는 닫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경의 상 중에 소동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으나 문전박대를 당하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방우였다. 그는 강력하게 항의하고 몸싸움을 해서라도 출입하고자 했으나 다부진 체격의 정장 여럿에게 내팽겨치자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체감하였다.

아스팔트와의 충돌로 인해 욱신거리는 무릎을 부여잡고 천천히 일어나던 그때, 그는 문 밖으로 잠시 고개를 내민 고동선과 눈이 마주쳤다. 싸늘한 눈으로 벌레보듯 방우를 쳐다보던 고동선은 말없이 다시 대문을 닫고 들어갔고, 그것이 신호인 마냥 정장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지 않으면 욱신거리는 무릎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표정으로 방우에게 다가왔다.

이후 방우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모찌의 아파트에 얹혀 살았다. 고 회장의 일본 집은 모찌의 집에서 멀지 않았기에 그는 거의 매일 같이 그 문제의 주택을 지나치며, 믿을 수 없이 가파르고 빠르게 추락한 그의 삶을 곱씹어보려 노력했다. 아직 서른 살도 살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다시는 그런 사랑을 느끼지 못할 것임을.

합리적인 결론인지, 감정적인 반응인지 정확히 판단할 순 없었지만 날이 갈 수록 고씨 가문과 고동선에 대한 원망은 깊어져만 갔고, 그는 사케의 도수로 채울 수 없게 된 마음 속 구멍을 하루가 멀다하고 위스키와 같은 독주의 도수로 채우기 시작했다.

모찌가 흔들어서 깨우고, 진통제를 놓고 출근한 그 날 역시 아침 식사 대신 위스키를 찾았다. 인근의 로슨 편의점에서 술 한 보따리를 사서 나오자마자 방우는 길가에 고꾸라졌다. 일본인 카운터 직원이 황급히 뛰쳐나와 다이조부데스까를 외쳤으나 방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 조용히 음주할 수 있는 모찌의 집을 향해 전진했다.

대업에 매진하기라도 하는 듯 모찌의 집으로 열심히 걸어가는 그는, 믿겨지지 않는 작금의 이 현실을 굳이 멀쩡한 정신으로 자각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단정했다. 단 일 분이라도 깨어 있는 시간을 제정신이 아닌 채로 보내는 것이 그에겐 제일의 우선 순위였다.

로슨에서 쇼핑한 주류를 모찌네 거실 소파에 널브러진 채 하루 종일 소비한 그는 문득 모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허물없이 지내는 대학교 베프 사이였어도, 자신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적 무게와 부담을 친구의 의사와 무관하게 친구에게 공동으로 짊어지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 덧 저녁 시간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모찌를 마주치기 머쓱해진 방우는 빠른 시일 내에 짐을 정리하여 귀국하기로 마음 먹고 우선 오늘은 모찌가 혼자 있을 수 있게 자리를 피해주기로 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내린 방우는 롯본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서늘한 가을 바람은 그의 숙취 해소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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