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 7잔 먹고 7년 되돌리다 · Episode 2 · KorBBH

기쿠히메 소개팅

집 근처의 그랜드 하얏트는 보는 눈이 많다고, 투명인간처럼 있고 싶다는 아경이 때문에 오게 된 곳은 경리단길 뒷 골목의 작은 이자카야였다. 뒷골목 중에서도 한 번 더 안으로 꺾어들어가야 하는 위치라, 금요일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전혀 없었다.

가끔 이자카야에 가서 술이 좀 올라오는 날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는 방우였다. 방우가 성인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기에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동네 이자카야를 출입 한 번 못해봤지만, 자신의 전부인 아경이와 함께 이자카야에 들어서는 이런 날에는 아버지께서 하늘 어딘가에서 지켜봐주고 계시길 바랬다.

생각해보면 아경이랑 처음 만난 날 마신 술도 사케였다. 프랑스에서 교환 학생을 마치고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미국으로 돌아와서, 그간 못 봤던 친구들과 차례대로 회포를 푸느라 주8일 술을 퍼마시는 나날들이었다. 그 중 참 특이한 모찌라는 일본인 친구가 주최한 기숙사 파티 덕분에 아경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날 아경이는 몸매가 선명히 드러나는 청바지 위에 아주 살짝 배가 드러날 듯 말듯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사실 대학생들의 기숙사 룸파티라 하면 대체로 싸구려 보드카나 위스키에 오렌지 주스 섞어 마시는 게 국룰이긴 하지만 이날은 방우가 하도 초면에 아경이에게 달려들 것 같은 눈빛이길래 - 라고는 어디까지나 모찌가 주장했던 바이다 - 모찌가 자신의 기숙사 스위트 내 다른 작은 방으로 둘을 불러서 엄청난 술을 주겠다며 거듬거듬 본인의 보물 창고 내 술병들을 하나씩 검토하다가 궁극에 꺼내어 내준 것이 기쿠히메라는 사케였다.

그가 달았던 주석에 의하면 이 기쿠히메는 일본 왕실에서 마시는 사케였고 그가 방우와 아경에게 줬던 기쿠히메 쿠쿠리히메가 해당 사케 브랜드의 플래그십 모델이었다. (너무 약치는게 아닌가 싶어서 이런 디테일을 다 기억했던 방우는 나중에 팩트 체크를 했는데 맞긴 했다.) 시간이 흐르고 사석에서 우연히 이 술을 접했던 방우는 그 자리에서 가격을 확인해 보았었는데, 판매가가 병당 백만원이 훌쩍 넘어서 갑자기 모찌에 대한 충심이 뒤늦게 솟구친 적도 있었다.

어째튼 그렇게 다른 애들처럼 시끌벅적한 공간에서 맥주와 보드카를 입에 턴 후 이 내용물을 다시 변기에 터는 과정을 겪지 않고 조용한 방에서 고급 사케를 홀짝대며 얘기를 했기에 두 남녀는 좀 더 고급지게(?) 호감의 싹을 틔울 수 있었고, 그들의 유학시절 마지막 학기는 뉴질랜드 꿀보다 달콤한 추억으로 가슴에 남았다.

방우는 아경이를 만나면서 처음에는 그녀의 백그라운드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한 몇 주 만나면서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자 몇몇 한인 유학생 동기들이나 후배들이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 아경이 집안 얘기를 해줬다. 건설업에서 시작했던 태성은 90년대 다양한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과 사업영역을 부풀리고 본업 또한 IT, 금융 쪽으로 전환하며 빠르게 재계 순위로 진입했다는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태성그룹 고상득 회장의 자녀로는 두 명의 아들과 막내딸 아경이가 있었는데, 장남인 고원선은 과묵한 편으로서 그룹의 메인 사업인 IT 쪽을 맡았고 차남인 고동선은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진 못했지만 나머지 금융 쪽에 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으며 유학생 사이에서도 요란하기로 소문난 관종이라는 평이었다.

'그래…관종 맞긴 한 것 같다…덕분에 오늘 모멸감을 느꼈었지…'

드디어 오늘 고동선을 실물로 접했던 방우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분을 삭혔다. 딴따라 취급받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어딘가 제대로 된 곳에 취직을 한 것도 아니고 혼자 매뉴얼도 빽도 없이 영화계에 출사표를 내겠다고 뚝딱뚝딱 거리는 게 한심하다는 눈빛은 워낙 많이 받았기에 기분 나쁠 일도 아니었지만, 그를 아경이의 배경에 빌붙어 뭔가 뜯어내려는 기생충으로 치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방우는 그 순간 당장 죽빵이라도 갈기고 싶었지만 남의 집에서, 부모님도 계신 자리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었고, 그런 머저리같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쪽팔렸다. 사케를 한 잔씩 들이킬 때마다 방금 전의 상황이 플래시백으로 재생됐고, 고동선의 재수없는 표정과 목소리가 그를 괴롭게 했다.

하지만 정말 괴로운 것은, 뭐라고 말할 수가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경이와 둘이 그곳에 간 이유. 가볍게라도 인사를 드려보려 했던 이유. 고동선이 그렇게 말하는 게 사실이 아닐지언정 제대로 대꾸를 하기도 어려운 이유. 아경이가 눈물을 흘렸던 이유.

"방우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지만, 두 남녀는 말없이 갖던 각자만의 사색 시간을 마치고 다시금 서로를 응시했다. 도쿠리 하나를 벌써 다 비운 방우와는 달리 아경은 그녀 앞에 놓여진 물 한잔에 입도 대지 않은 듯 했다.

"응."

"아까 미안해. 오빠가 좀 못됐어."

"아니야…솔직히 나보다 너가 상처받았을까봐…"

"오빠는…문제없어. 나니까 괜히 그러는거야."

"무슨 말이야?"

"나 이제 대학 졸업한지도 거의 2년 되가는데 대학원 준비한답시고 놀기만 하는 꼬라지 보기 싫어지니까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하고 나한테 회사로 들어와서 집안일을 하든 어디 맥킨지나 골드만 같은데 취직하든 빨리 결정하라고 하시고, 부모님이 그렇게 밀어붙이는게 오빠한테 압박이 되는 거지."

"그게 왜?"

"왜냐하면 나는 경제학 전공이고, 오빠보다 똑똑하니까 오빠가 원하는 우리 집 금융 쪽 사업은 결국 내가 하게 될테니까. 난 그쪽에 별로 관심도 없지만 또 싫을 것도 없어서 부모님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할거야. 그리고 좆나게 잘할거야. 그러니까 그것만 바라보던 우리 오빠는 짜증나지."

자신과 다른 세상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아경에게 경청하며 방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거 알아? 내가 왜 뒤늦게 너 다니는 학교로 편입했는지?"

"..?"

"너 만나고 싶어서…는 당연히 아니구 ㅋㅋ 내가 그 정도 되는 학교에 편입한다면 내가 전공 수업 외에는 하고 싶은대로 하고 듣고 싶은 수업 듣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된다고 해서 이 악물고 편입 준비한 거였어. 물론 하고 싶은 거 해도 된다는 건 당연히 대학 졸업할 때까지였지만. 그래서 나 미술 수업이랑 사진, 영화 수업 엄청 들었잖아."

방우는 그들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뼛속까지 문송인 문학도인 채 학위를 수료하였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이 귀엽고 아름다운 여자는 언제든지 음악이나 회화, 영화나 공연에 대해 수준 높은 대화가 가능했으며 동시에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정책이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대형 사모펀드 M&A 딜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파고 들 수 있는 인재였다.

자신의 분야와 상극이라고 여겼던 상업적 금융의 세계에 자유로이 출입하면서도 자신에게 친숙한 시각예술의 세계에도 접근 권한을 갖고 있는 그녀에게 방우는 존경심과 호감을 느꼈다. 방금 전 그가 출입했던, 이태원과 한남동의 경계에 있는 그녀의 고급 주택처럼 그녀의 정신 세계 또한 이태원스러운 세계와 한남동스러운 세계의 경계에 걸쳐있는 듯 했다.

방우는 둘이 시간을 보내면 보낼 수록 감수성과 센스가 상당히 충만한 아경의 눈썰미에 감탄했고, 그녀의 자잘한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또한 20대 초반의 젊은 그가 그간 막연하게 어려워하거나 심지어 경시하던 사업과 장사의 영역에 대해서도 점층적인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맞아. 우리 아경이는 맨날 내가 쓰는 대본이나 만드는 영화 러프 컷 보면서 상업성 제로라고 엄청 뭐라고 했지."

"아니 ㅋㅋㅋㅋ 뒤끝 쩌네 우리 애기~ 난 그저 자기 여친으로서 자기가 가장 뛰어난 영화감독이 될 수 있도록 자양분을 주려는 것 뿐이었거든?"

"응 고맙다야 ㅎㅎ. 아니 정말로. 한번은 너가 자꾸 그렇게 말하는 것 때문에 나도 화나서 우리 대판 싸웠었잖아. 그때 너가 그랬지 - 너희 부모님한테 손 벌리러 오는 제작사나 예술가들 많다고. 내일 모레 환갑인데 하루가 멀다하고 다 탈모된 정수리 보이게 폴더 인사하면서 간청하는 사람들 많다고. 그게 비판할 일도 아니고, 잘못됐거나 그들이 부족한 것도 절대 아니고, 그냥 원래 그런 거라고. 그래서 적어도 나는 그런 배고픈 예술, 힘든 예술 오랫동안 안했으면 좋겠다는 취지였다고. 나 그말 듣고 생각이 많아졌었어. 고마웠어."

아경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돈을 잘 버는 감독이어야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 만들 수 있잖아? 그 전에 많이 히트시켰으면 그만큼 많이 말아먹어도 되고. 그냥 힘이 있어야 된다는 논리를 얘기하는 거였어. 구걸하는 것보다 굴복시키는 게 이 세상에선 유용할 때가 많으니까. 아름다움 뿐 아니라 힘이 있어야 된다는…"

먼 곳을 쳐다보며 나직이, 하지만 힘을 실어 말을 하는 아경을 보고 방우는 자신이 그녀에게 매료됐던 수많은 이유 중 또 하나를 기억해냈다. 유투브를 같이 보거나 놀이공원에 가면 한없이 천진난만한 애교덩어리였던 그녀는 일과 관련된 주제로 대화가 전환되면 마치 또다른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전혀 F가 아니고 절대적으로 T같은 마인드를 보여주곤 했다.

연애 초반에는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인가하고 신기해했지만, 이내 그러한 사고 방식 또한 나름의 합리성이나 성숙함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고 수긍하게 된 그였다. 근 2년 동안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온 그들이었지만,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했듯이 이러한 그녀의 다소 마키아벨리적인 실용주의가 대체 그녀의 머릿속 어디까지 뻗치는 사상일지 방우는 이따금씩 궁금했다.

"아직 내가 그런 힘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무슨 얘긴지는 알 것 같애. 그런 맥락에서 자기도 자기 집안의 가업 안에서 해야할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겠다는 거고."

"응. 물론 편입하고 나서 정말 행복했고, 특히 자기 만나고 나서 정말 행복했어. 지금까지 난 자기처럼 예술 쪽의 일에 몸담고 살진 못하겠지만, 내 갈 길 가면서 자기 옆에서 이방우라는 사람이 성장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를 것 같애. 그리고 우리 오빠는 내가 가업을 이어 나가는 모양새가 싫어도 어쩔 수 없는 거고."

화두가 다시금 가족으로 돌아오니 아경의 화색이 어두워지고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호흡엔 무거운 두려움이 담긴다.

"하지만, 하지만…우리가…."

굳이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알기에 방우는 말없이 그녀의 창백한 손등을 살며시 부여잡았다.

"우, 우리가 지금…필요한 건…"

결국 회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을 막상 입 밖으로 내려하니 그녀는 무너져버렸다. 고동선의 말이 틀렸더라도 이방우가 뭐라할 수 없었던 이유. 결론적으로 고동선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유이며, 지금 이 커플이 절실히도 부모의 축복과 지원이 필요했던 이유.

아경은 방우의 가슴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을 울었다. 이자카야 사장은 주방으로 이석하여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 방우의 머릿 속엔 오만 오천가지의 생각이 지나갔다. 서로가 십일만가지 생각을 하고 나서 드디어 아경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음 주 화요일 다시 초음파야."

방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그날 다 비워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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