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과 한남동의 경계 어딘가에 있는 이 조용한 언덕의 골목길은, 전혀 조용하지 않은 집들로 가득했다. 저택마다 담장이 웬만한 저층 건물보다 높을 정도로 웅장함이 미어터져 나오는 이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던 이방우는 저절로 위축되는 자신의 어깨를 펴보려 애를 썼다.
그런 그의 심리를 읽기라도 하듯, 그의 손을 꼭 잡고 옆에 서있던 그녀는 방긋 웃으며 물었다.
"괜찮아?"
"아경아, 정말 가도 되는 걸까?"
"ㅋㅋ 뭐야~ 몇 번째 물어보는 거야! 당연하지. 정말 별 거 없다니까 왜 그래!"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고아경은 뒷걸음질치며 방우를 자신의 집 대문 앞으로 유인했다. 그녀가 인터폰에 채 손을 대기도 전에 몇 걸음 떨어진 쪽문에서는 다부진 체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정장차림의 사나이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아경씨 오셨습니까?"
외모와 매칭이 안되는 차분한 목소리로 90도 인사를 시전하는 사나이를 보고 방우는 더욱 긴장하였다. 웬지 오늘은 무언가가 단단히 꼬일 것 같은 느낌이다.
"네. 엄마 안에 있죠?"
"예. 사모님께서는 별채 거실에 계십니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방우야 들어와!"
차분한 목소리와 온화한 눈빛의 사나이는 고아경이 문 안쪽으로 사라지자 문 밖에 서 있는 방우에겐 오로지 다부진 눈초리로 노려보는 듯 했다. 한숨을 쉬거나 에이씨 한 마디라도 하고 싶었으나 방우는 신속히 아경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반가워요. 우리 아경이가 얘기를 하도 많이 하길래 기회되면 한 번 보고 싶었어요."
"엄마 내가 언제 얘길 많이 했다고 그래!"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아경을 훑어보는 아경이의 어머님은 누가 봐도 특급 사모님 포스를 물씬 풍기는, 아름답게 나이를 잘 먹었다는 표현의 표본이 되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방우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모님 입가 위의 자상한 두 눈에서 자신을 냉철히 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찾아뵈면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했는데요."
"그럴리가요. 이렇게 멋진 총각이 집에 있으니까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데."
아경이를 쳐다보며 사모님은 살며시 웃었다.
"아 엄마 진짜…"
"저희, 아이스 커피랑 차 좀 갖다주세요."
사모님은 아경의 뾰루퉁한 입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지근거리에서 깍지낀 양손을 앞으로 내린 채 대기하고 있던 이모님에게 턱으로 지시했다. 이모님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총총걸음으로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래, 아경이랑은 미국에서 만난 대학 동기죠?"
다시 온화한 미소가 입가로 돌아온 그녀가 물었다.
"네, 맞습니다. 사실 마지막 학기나 되서야 제대로 알게 되어, 거의 졸업하고 귀국한 뒤 한국에서나 제대로 알게 된 사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아경이가 수업을 하도 안 가서 강의실에서 볼 일이 없어 알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닌가요?"
"아 엄마!!!!!!!"
키득거리는 입을 족히 3캐럿은 되보이는 다이아 반지를 낀 손으로 가리며 웃는 사모님은 어딘가 진심으로 본인 딸을 놀리는 것을 즐기는 듯 했다.
"하하, 아닙니다 사모님. 아경이는 굉장히 착실하게 학교를 다녔던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한동안 파리에 교환학생으로 나가 있다가 마지막 학기에 맞춰 복귀하는 바람에 좀 늦게 알게 된 것 뿐입니다."
"오 파리요? 전공이 뭔가요?"
"전공은 문학이고, 부전공은 영화입니다."
"어머, 미국에서 문학 전공하는 한국 사람은 또 처음 봤네. 참 대단하시네요. 게다가 부전공은 영화라고? 혹시 무슨 일하세요?"
드디어 불편한 대화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군, 하고 방우는 생각했다. 괜히 왔나 싶기도 하고…
"아, 저는 독립 영화 만들어보려고 준비 중입니다."
"어머 너무 멋있다~! 나 복준호 감독이랑 방찬욱 감독이랑 엄청 친한데~ 혹시 그이들 알아요?"
"아, 하하,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당연히 누구신지는 압니다."
"혹시라도 소개 필요하면 얘기해요. 나야 잘 모르는 일이지만 그쪽에선 이런 거 좀 중요하다면서요? 잠깐만요 내가 폰을 어디 놨더라…복 감독이랑 방 감독 중에 누가 먼저 전화를 받으려나…"
그녀가 허리를 굽혀 발맡에 놓은 가방 속 물건들을 주섬주섬 뒤지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넘기기 시작하자 아경은 재빨리 폰을 빼앗고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엄마 또 그런다. 됐어 마음만 받고 나중에 방우가 진짜로 뭔가 부탁할 일이 있으면 그때나 좀 도와주세요."
"하하하 얘 좀 봐. 알겠어 가~만히 있을게. 마침 딱 커피도 왔네. 방우씨 이것 좀 마셔요."
아이스 커피 세 잔과 여러 가지 차 세팅을 해온 이모님께 속으로 108배를 하며 방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 심정은 마일드한 패닉으로 바뀌었다.
대문 앞에서 차분하게 말하던 옹골찬 몸집의 사나이와 매우 유사하게 생긴 또다른 사나이가 기민하게 별채로 들어와 사모님 앞에서 90도 폴더 인사를 재현했다.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태성그룹의 고상득 회장은 실물이 화면보다 훨씬 날카로워 보이는 상이었다. 스쳐 지나가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아우라를 앞에 두니 무릎이라도 꿇은 채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의 옆에 앉아있는 차남 고동선은…식견이 아닌 신경이 날카로운 쪽인 걸로 보였다. 부모님 앞임을 개의치 않고 한 쪽 검지로 소파를 계속 두드리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뭔가 중얼거리는 듯했다.
"그래, 자네는 무슨 일을 하는가?"
고 회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방우를 쳐다보았다.
"아, 저는 현재 독립 영화…를 준비해보고 있습니다."
고 회장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호오."
분명 반박자의 짧은 호흡이었으나 방우에겐 깊은 탄식처럼 들렸다. 고 회장이 얇디 얇은 인위적 격려의 표정을 지으려 입꼬리를 살짝 올린 건지, 입꼬리를 올린 게 맞기나 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입가에는 미동이 없는 것 같았다. 옆에 앉은 고동선은 양말을 한 쪽 검지로 쑤시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비싼 대학 나와서 그 개고생을 한다니 희한하네. 집에 돈이 좀 있나? 아님 취업 자신이 없었나?"
"오빠!"
"큭큭 아니 그렇잖아 - 제대로 영화 만들거면 영화학교를 가던지. 그리고 너도 사람 좀 보고 다녀라. 내 주변에도 눈 안 뜨고 다니다가 옆에 이상한 애 붙어서 망한 놈들 있어 겁나 불쌍해. 나중에 우리한테 취집오려는 거 아냐?"
"오빠!!!!"
거실의 기류가 혹한기로 급발진하여 되돌릴 수 없는 상태였다. 무표정했던 고 회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면서 동시에 옹골찬 몸집의 사나이들보다는 몇 배 더 매서운 눈빛으로 그의 차남을 흘겨봤다. 고동선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떨구며 시선을 회피했다. 고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네. 방우…군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그래 편히 있다 가게. 어차피 난 잠깐 얼굴만 비추러 온 게야. 이만 식사하러 나갈 테니 신경쓰지 말고 있다 가."
"감사합니다."
방우는 방금 전 출입했던 식솔 마냥 고 회장의 등을 향해 90도 폴더 인사를 했다. 고 회장은 갑자기 다시 몸을 돌려 방우 쪽을 쳐다보며 외쳤다.
"고동선."
귀를 긁던 고동선은 번쩍 일어나 고개 숙이는 시늉을 하고 고 회장을 따라 나섰다. 고씨 가문의 남자들이 모두 퇴장한 후에서야 방우는 남들이 포착하지 못한, 소리없이 붉어진 고아경의 눈시울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