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가 밝아왔다.
방우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수업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점심시간에 윤영이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대꾸했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개 폐인인데? 오늘이라고 했지 그거? 후..."
"어… 뭘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겠다. 일단 부딪혀봐야 될 거 같애."
"뭘 어떻게 부딪힌다는 건데."
"하..."
윤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방우는 이자카야로 향했다. 아직 영업 시간 전이었지만 이성재는 이미 주방에서 칼질을 하고 있었다.
"어 장남 왔어? 오늘도 구경하러 온 거야?"
"네. 밥값이나 하려고 좀 도와드리려 왔어요."
"밥값? 생전 한번 계산 안하고 평생을 외상으로 살던 니가? 임마 공부나 할 것이지 무슨 밥값 타령이야 열심히 공부해서 돈 많이 벌어서 이 애비 비싼 식당 데려가고 호강시켜야지!"
말은 저래도 눈가엔 흐뭇한 미소가 가득한 이성재였다.
"공부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아버지도 도와드리면 되죠. 머리도 식힐겸 조금만 도와드릴게요. 설거지 어떤가요?"
이성재는 아들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앞치마를 하나 던져줬다.
"그래. 머리도 식히고 가게 일도 돕고 돈도 많이 벌어라."
방우는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 섰다. 아버지 옆에서 설거지를 하고, 접시를 닦고, 간단한 반찬을 옮기는 동안 그의 눈은 계속해서 입구를 향해 있었다. 시계는 일곱 시를 넘기고, 여덟 시를 넘기고, 아홉 시를 넘겼다.
손님들이 들고 나고, 웃음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가게를 채웠다가 빠져나갔다. 단골 아저씨가 이성재에게 우동 국물이 오늘따라 유독 맛있다고 칭찬했고, 이성재는 아들이 와서 그런 거라며 방우의 등을 툭 쳤다.
열 시가 넘었다. 방우의 긴장은 분 단위로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열 시 반.
문이 열렸다.
고동선이었다. 그리고 그날과 같은 무리. 아니 — 이틀 전보다 한 명이 더 많았다. 여섯 명. 이미 술이 들어간 상태였고,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이전보다 더 거침없는 태도로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단골 아저씨들이 앉아있던 테이블 바로 옆이었다. 알바생 박준혁은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지만, 고동선은 킥킥대며 검지 손가락으로 그를 호출했다.
"소주 여섯 병. 생맥 여섯 잔. 오코노미야키 두개. 계란말이 하나. 모듬 꼬치 하나. 십분 준다."
박준혁은 겁에 질린 모습으로 조속히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방우의 맥박은 하염없이 솟구쳤다.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꽉 쥐었다.
고동선 일행은 소주 세 병과 맥주 한 묶음을 한꺼번에 주문했다. 알바생은 신기록을 세울 스피드로 술부터 고동선 일행에게 갖다바쳤다. 허둥지둥 삐질삐질인 그의 모습에 일행은 키득거리며 좋아라 박수치고 데시벨 높은 웃음을 연속으로 발사했다. 소주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지나치게 컸고, 한 명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웃는 바람에 옆 테이블의 단골이 소주잔을 떨어뜨렸다. 이성재는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준혁아 여기 사케도 하나 갖고와라!"
고동선의 일행 중 하나가 건방진 어조로 외쳤다. 이성재는 알바생의 표정을 살피고 괜찮다는 손짓을 한뒤 직접 사케를 들고 나가 테이블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손님들, 즐겁게 드시는 건 좋은데 옆에 다른 분들도 계시니까 좀만 볼륨 조절 부탁드릴게요."
"아 네네."
대답은 했으나 30초도 지나지 않아 볼륨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더 커졌다. 고동선은 자기 옆의 친구에게 뭔가를 속삭이더니 둘 다 크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이 가게와 이 가게의 주인을 향한 경멸이 은연중에 묻어있었다.
방우는 카운터 뒤에서 고동선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이 사람은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가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될지 모른다. 이 사람에게 이 이자카야는 그저 싸구려 선술집이고, 여기 주인은 그저 안주나 만드는 아저씨일 뿐이다.
하지만 방우는 안다. 이 아저씨가 새벽부터 일어나 아들 생일이라고 전복 미역국을 끓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카운터에 앉은 손님의 하소연을 묵묵히 듣다가 반주 한 잔을 서비스로 내미는 사람이라는 것을. 계란말이를 말 때 젓가락을 0.5초 단위로 정확하게 돌리는, 수십 년의 성실함이 체화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사람이 저 무리 때문에 죽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아직 목격하지 않았지만 핏 속에서 끓어오르는 직감적인 분노로 알 수 있었다.
이전의 세계에서 정확히 어떤 경위로 사건이 벌어졌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 가게에서 일어난 일이고 고동선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안다. 그렇다면 아마 경찰 조사는 흐지부지 끝날 것이고, 고동선은 권력의 힘으로 심판을 피해갈 것이다.
열한 시가 되자 가게 안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고동선 일행의 취기는 임계점을 넘고 있었다. 한 명이 일어나 화장실로 가면서 옆 테이블의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실수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으나, 의자에 앉아있던 중년 남성이 일어나며 뭐라고 한마디 하자 고동선의 친구가 돌아서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뭐요. 뭐가 문제요."
"아니 지나가면서 의자를 차면 사과를 해야지—"
"내가 언제 찼는데요? 증거 있어요?"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성재가 주방에서 나왔다. 앞치마를 두른 채, 국자를 아직 손에 들고 있었다.
"자자, 됐습니다. 다들 술 드시는 자린데 좋게 좋게 하시죠."
이성재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양손을 가볍게 벌리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 중년 남성은 이성재의 얼굴을 보고 한 발 물러섰다. 단골이었으니까.
하지만 고동선의 친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일어선 고동선의 표정 — 그 표정을 방우는 잊을 수 없었다. 귀찮다는 듯, 그러면서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듯한, 술에 젖은 오만함.
"사장님은 좀 빠져주시죠.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거든요."
고동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성재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 제 가게입니다. 제 가게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제가 나서는 게 당연하죠."
"소란? 누가 소란 피우는데요? 저 아저씨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아닙니다 손님. 제가 처음부터 봤고, 지나가시면서 의자에 부딪히신 건 맞습니다. 사과 한마디면 끝날 일이에요."
고동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눈. 한남동 저택에서 방우를 쳐다보던 그 눈과 정확히 같은 종류의 시선이었다. 벌레를 보는 눈.
"사장님이 좀 오지랖이 넓으시네."
이성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평생을 이 카운터 뒤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온갖 종류의 취객을 상대해봤고, 싸움도 말려봤고, 새벽 세 시에 울면서 돌아온 손님의 등을 두드려준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 발 더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았고, 한 발도 물러서면 안 될 때도 알았다.
"우리 가게에서 드시는 손님 모두가 편하게 지내셨으면 합니다. 그게 오지랖이면 할 수 없지만, 사과 한마디만 해주시면 제가 서비스로 한 병 내겠습니다."
이성재의 목소리는 단호하되 적대적이지 않았다. 수십 년의 장사가 빚어낸, 상황을 수습하면서도 존엄을 지키는 목소리였다.
고동선은 잠시 이성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빈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장난처럼. 위협처럼. 그 경계가 모호한 동작으로.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방우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노심초사하며 주방에서 튀어나가 카운터를 돌고 홀 쪽으로 나갔다.
"아빠 제가 할게요 신경쓰지 마세요—"
방우가 이동하는 몇 초의 동선 동안 홀의 상황은 그의 시야에서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구간 동안 고동선의 손에서는 소주병이 날아갔다. 그가 일행 중 가장 뒷편에 있었기에 소주병을 투구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 박준혁을 제외하면. 병은 이성재의 관자놀이를 강타하고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갑작스러운 타격에 이성재의 몸은 뒤틀리며 고꾸라졌고, 재수없게 흠뻑 젖어있던 바닥에서 이성재는 미끄러지며 뒤로 넘어졌다.
그의 후두부가 야속하게도 날카로운 금속 카운터 모서리에 부딪히는, 아니 찢겨들어가는 괴로운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방우가 듣고 싶지 않았고, 듣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소리였다. 마치 방우를 조롱하듯, 그 소리는 가게 안에서 당황한 모든 사람들의 정적 사이로 배가되어 진동했다.
"아빠!!"
방우가 달려갔을 때 이성재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으나 초점이 없었다. 후두부에서 흘러내린 피가 부엌의 타일 위로 번져나가며 짙은 빨간색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고동선의 일행은 굳어있었다. 누군가가 핸드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 고동선은 — 고동선은 깨진 소주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술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고동선 일행 중 한 명이 재빠르고 소리없이 박준혁을 향해 손짓했다. 그리고 얼빠져있는 고동선의 귓속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보이는 고동선은 일행과 수근거리며 긴급한 작당모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나선 얼어있는 박준혁을 구석으로 끌고가 귓속에 어떠한 지시를 내리꽂았다.
방우는 아버지의 머리를 들어 올려 무릎에 올려놓았다. 피가 교복 바지에 스며들었다. 따뜻했다. 아버지의 피가, 아직 따뜻했다.
"아빠. 아빠 괜찮아요. 금방 와요. 조금만."
이성재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호흡이 새어나가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구급차가 도착하기까지 일곱 분.
이성재의 눈이 감기기까지 네 분.
장례식장은 용산구의 어느 병원 지하에 있었다.
방우의 옆에는 과부가 되어 남은 이현숙만 홀로 앉아있었다. 아버지의 지인들과 단골 손님 몇 명이 조문을 왔다 갔고, 방우가 가게에서 한 두번 본적 있는 단국대 학생 두 명이 어색한 표정으로 국화꽃을 놓고 돌아갔다. 방우의 가족이 참으로 친척이 없고, 있는 친척마저도 관계가 끊어진 조촐한 식구임을 실감하는 날이었다.
유윤영과 박민준이 교복 차림으로 장례식장에 나타났을 때, 방우는 빈소 앞 의자에 앉아 아무런 표정 없이 영정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속 이성재는 두꺼운 안경테 너머로 어설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권 사진이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여권을 만들겠다고 사진관에 다녀와서 인화한 여러 사진 중에 남은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여권을 만드시지 못하였고, 해외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
윤영은 아무 말 없이 방우의 옆에 앉았다. 민준은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나서 가만히 서 있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몇 걸음 물러났다.
한참의 정적 후에 윤영이 입을 열었다.
"경찰서에서 뭐래?"
"가게에서 언쟁하다가 운 나쁘게 생긴 사고라나. 사고사로 처리해야될 거래."
이미 방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임을 들었었던 윤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사고사? 진짜 그게 맞아?"
"사고라..."
방우는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이성재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랐다. 미처 못한 말들이 있다는 표정. 죽기 전에 마지막 힘을 짜내서 무언가 말하려고 했었던 아버지의 입술이 생각나자 울컥하는 감정을 억제해야 했다.
"윤영아."
"응."
"사고 아니야. 증거는 없지만."
윤영은 방우를 쳐다보았다. 방우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다. 그 대신 윤영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갑고 고요한 빛이 서려 있었다.
"고동선이야. 태성그룹 회장 아들."
윤영의 눈이 좁아졌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놈이 현장에 있었어. 그리고 그 새끼가 던진 소주병으로 아빠가 죽은거야. 하필 결정적인 순간을 내가 보진 못했지만 그놈이 소주병 갖고 히죽대고 있었어. 그 개새끼가 맞아. 그리고 그 새끼는 빠져나갈 거야. 변호사 깔고, 돈으로 무마하고, 다른 놈한테 뒤집어씌우든 뭘 하든. 빠져나가."
방우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그래서 어쩔 건데."
방우는 영정 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두꺼운 안경테. 여권용 어설픈 미소. 새벽에 일어나 전복 미역국을 끓이던 손. 계란말이를 정밀하게 돌리던 젓가락질. 카운터 너머로 손님에게 건네던 조용한 한마디.
"모르겠어. 아직은."
방우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이미 무언가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것은, 슬픔보다 단단하고 분노보다 차가운, 복수라는 단어가 채 담지 못하는 종류의 결의였다.
장례식장의 형광등이 무심하게 빈소를 비추었다. 국화꽃 향이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방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영정 사진 앞에 섰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번에도 못 지켰어."
그것이 이방우가 두 번째 인생에서 아버지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